2016년 3월 한창 이세돌과 알파고가 세기의 대결을 펼칠 때, 나는 훈련소에서 한창 사격 주간에 돌입할 시기였다. 하지만 난 운이 좋게도(?) 폐렴에 걸려서 PRI니 뭐니 다 째고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그 곳에 있는 티비를 통해 그 역사적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난 딥러닝 정책망이니 뭐니 이런거는 커녕 cpu니 그래픽카드니 뭐니 인공지능 및 프로그래밍에 대한 기초는 물론이고 컴퓨터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게 없는 이 시대의 흐름에 진정으로 역행하는 인재였다.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같은 상태이다. 제누스창조주님 화이팅)
그 당시에는 인공지능이 바둑으로 인간을 이기려면 몇십년은 걸린다느니 했었는데, 병실에서 직관하면서 나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바둑은 19x19 격자의 361집을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즉, 누가 더 넓은 땅을 가지는지)의 대결인데 알파고는 그런 점에서 아주 충실하게 계산력으로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다.
1국은 뭐 어느정도 팽팽한 흐름이었다가(해설자들이 그렇게 해설했던거 같다) 중후반 알파고의 날카로운 한 수에 대국장과 해설진들의 분위기가 얼어붙었고, 그렇게 이세돌은 패배하였다. (웃긴건, 먼 훗날에 새로 공개된 다른 바둑 인공지능을 돌려보니 사실 이세돌은 처음부터 끝까지 쭉 불리했었다.) 해설자들은 알파고가 두는 수들에 죄다 '이거 이상한데요? 이게 뭐죠?' 하다가 1국에서 알파고가 이기자 해설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2국은 인간의 기보를 보고 학습했다는 알파고가 초반부터 이전에 인간이 거의 두지 않았던 새로운 수법을 들고나와 해설자들과 이세돌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 중반에 알파고의 실수(처럼 보였던 것)를 이세돌이 제대로 응징하지 못했다는 평이 나왔고, 대국은 거의 끝까지 두어가며 이세돌이 미세하게 불리한 상황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뒤집지 못하고 또다시 패배하였다. 이때 알파고는 우세를 의식하고 이세돌의 승부수에 적당히 이길만큼만 양보한다는 점이 과거 이창호 전성기 시절의 스타일과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세돌은 형세의 유불리에 관계없이 본인만의 뛰어난 수읽기를 앞세운 전투바둑에 특화된 사람이었기에, 알파고의 '유리하면 절대 안 싸우고 걸어잠그는' 바둑에 완벽히 상성에서 밀리는 것이었다.
3국에서 이세돌은 초장부터 박살났다. 이세돌은 중반 전투에 비해 초반 포석이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데, 결국 그 초반 포석에서 완전히 망해버렸고, 알파고에게 거대한 땅을 내주고 말았다. 이세돌은 그 거대한 땅에 마치 무장공비를 투입하듯 들어갔지만, 들어간 돌들을 살리기가 어려워지면서 그렇게 허무하게 알파고의 우승이 확정되었다.
이제 우리가 아는 4국. 이세돌이 알파고를 상대로, 그리고 인류가 알파고를 상대로 승리한 유일한 대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흑을 잡은 알파고가 다시 국면을 압도하며 또다시 커다란 땅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세돌은 그 거대한 땅에 다시 뛰어들어가서 어떻게든 그 땅을 부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신의 한수', '기적의 78수'가 등장하며 상황을 반전시켰고, 알파고는 자멸하며 'AlphaGo Resigns'를 선언했다. (웃긴건, 사실 이세돌가 둔 78수를 알파고가 잘 대응했으면 여전히 알파고가 압도하는 형세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5국에서는 흑을 잡은 이세돌이 초반에 실리를 챙기며 앞서는가 싶었지만 알파고의 큰 그림에 여전히 이세돌은 아쉽게 2승을 챙기지 못한 채 대회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렇게 이세돌은 인공지능에게 첫 패배를 당한 사람이면서 첫 승리를 가져온 사람이 된다.
1년 뒤에 알파고는 더 업그레이드되어 인터넷 초속기(제한시간이 매우 짧음) 대국에서 한중일 프로기사들을 상대로 60전 전승을 거두고, 이후에 벌어진 '바둑의 미래 서밋'에서 당시 세계랭킹 1위인 커제를 3번기에서 3:0으로 누르며 또다시 우승한다.
이후 딥마인드는 인간의 기보를 학습하지 않은 채로(심지어 바둑의 기본적인 룰조차 모르는 상태로) 스스로 학습하는 알파고 제로를 만들었다. 40일동안 수천만판을 학습한 알파고 제로는 커제를 이긴 버전을 100전 89승 11패로, 이세돌을 이긴 버전을 100전 100승으로 압도하는 성적을 내고 바둑계에서 은퇴했다.
알파고가 처음 나왔을 때, 페이스북도 엘프고라는 바둑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알파고에게 1등을 빼앗기자 페이스북은 홧김에(?) 엘프고를 오픈소스로 공개해버렸고, 이때부터 온갖 종류의 바둑인공지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엘프고, 릴라, 미니고 등등 이제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까지 나온 버전들은 이세돌, 커제와 둔 알파고보다 훨씬 강한데, 그 강함의 정도라 함은 최상위 프로기사들도 2점을 깔아도 이기질 못하고, 갓 입단한 프로들은 3점을 깔아도 이기지 못하는 수준이다.
(* 하수가 흑을 잡고 미리 흑돌 2개, 3개가 놓여진 상태에서 바둑을 시작하는 것이다. 미리 놓인 돌이 있는 만큼 흑이 훨씬 더 유리하게 시작하며, 이렇게 미리 깔아둘 흑돌의 개수를 조정하며 하수와 고수가 대등하게 바둑을 둘 수 있다.)
아래의 캡쳐는 바둑 어플에 인공지능 수준을 인터넷 바둑 1급 수준에 맞춰놓고, 내가 흑을 잡고 둔 대국을 카타고라는 인공지능으로 복기하는 모습이다. (내가 이겼다 ㅋ) 각 수마다 승률기대치, 연산횟수, 상대와의 격차 순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블루스팟이 인공지능의 추천수이고, 테두리가 짙은 선으로 그려진 부분이 실제로 내가 둔 곳이다. (흑을 잡은 나는 이 캡쳐의 상황에서 인공지능의 추천수(블루스팟)이 아닌, 그보다 우측 한칸, 아래로 한칸인 자리에 둔 것이다.)
내 노트북의 성능이 어느정도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대충 7년전쯤에 48만원(중고 아님)을 주고 산 Hp 노트북임을 감안하면 어느정도인지 감이 올 것이다. (성능도 성능이고, 너무 오래되어서 이제는 23-24년전에 출시된 게임인 스타크래프트도 힘들어하는듯 한다.) 과거 이세돌과 맞붙었던 알파고는 당시 어마어마한 성능의 슈퍼컴퓨터로 무장했지만, 불과 몇 년만에 이런 구린 성능의 노트북으로도 프로기사들이 절대 이기지 못한다는게 참 어이가 없다.
바둑 인공지능이 바둑계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글로는 다 옮기지 못할 정도다. 사실 알파고와 이세돌이 대결하던 시기에는 안 그래도 한국바둑이 중국바둑에 밀리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이세돌의 패배가 확정되면서 일부 후원사가 후원을 중단하였고, 그 바람에 국수전, 입신최강전 등 국내대회 일부가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지금은 다시 신진서, 박정환, 신민준 등의 활약으로 한국바둑이 앞서가기 시작했고, 덕분에 사라진 국내대회가 부활하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고 있다.)
모든 프로기사가 인공지능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바둑 연구 환경이 크게 바뀌었고, 바둑 해설자들도 인공지능에 의존하며 '아 이렇게 두면 인공지능은 이렇게 판단을 하네요'라며 인공지능의 수를 해설한다. 또한 보통 대국이 끝나면 두 대국자가 그 자리에서 복기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요즘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컴퓨터로 달려가 인공지능으로 복기를 하는 문화로 대체되었다.
사람마다 대국 스타일이 모두 다르다. 조훈현은 이른바 '속력행마'라 불리며 발빠르게 두어가는 스타일, 이창호는 형세판단에 따른 계산력과 끝내기로 딱 이길 만큼만 이기는 스타일, 이세돌은 압도적인 수읽기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스타일 등등 각 기사들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두어가며 자신만의 정수를 만들어갔다. 즉, 완전한 착각이 아닌 이상 그들이 두는 수는 그저 그들의 스타일에 맞게 두어진 것일 뿐, 실수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개성있는 스타일들은 인공지능이 계산한 숫자에 평가를 당하게 되고, 그들의 수들은 스타일과 무관하게 좋은 수냐 아니냐로만 판단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두는 수는 정수, 실수, 승부수로만 분류당하게 된다.
원래 바둑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실력이 낮은데(세계랭킹 100위 안에 여자 선수는 한 손에 꼽는다), 아직 중학교 1학년의 갓 입단한 유망주 여자 선수가 노련한 30대의 9단인 남자 선수를 압도하며 이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알고보니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치팅을 한 것이었고, 이 사실이 적발되어 해당 여자선수는 1년간 선수생활 금지를 당했다. 여자 선수의 인공지능의 추천수를 맞추는 비율이 비정상적(90% 이상)으로 높아서 들킨건데, 어느정도 수준이었냐면 이정도 일치율이면 현 세계랭킹 1위인 신진서9단도 압도할 정도다. (참고로 신진서는 별명이 '신공지능'이라 불릴만큼 인공지능에 가장 가깝게 두는 것으로 평가받는데, 가장 명국이라 불릴 대국에서도 70% 안밖의 일치율을 보인다. 말이 90:70이지, 실수의 비율로 따지면 10:30으로 3배가 차이나는 것이다.) 이렇듯 상대 남자 선수는 찐으로 인공지능과 대국을 한 셈이니 이길 수 있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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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인공지능의 등장의 파급력은 아마 체스의 그것보다는 다소 약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긴 첫 게임이 체스였기도 했고, 체스가 바둑보다 훨씬 더 범세계적인 마인드 스포츠이니까.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딥러닝을 장착한 인공지능의 활용은 단순히 게임에 국한될 문제도 아닐 것이다. 이미 테슬라를 비롯하여 수많은 기업들이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는 (실험실에서 밤새가며 분석해야 알 수 있는)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인공지능인 알파폴드를 구현했으며, 그 정확도는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져있다. (* 그 외 다른 단백질 구조 예측 인공지능로는 로제타폴드가 있다.) 즉, 이제 인공지능은 게임따위가 아닌, 타 이공계열의 세계에도 발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기술 발전의 특이점(Singularity)를 목도하고 있다.
2017학년도 수능 가형 30번 출제자로 알려진(아마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이 큼) 연세대학교 수학과 기하서 교수는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 훗날에는, 인공지능이 수학 난제를 해결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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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는 이후에 스타크래프트2를 다루는 인공지능인 알파스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참신한 전략은 커녕 절대 인간이 따라할 수 없는, 1000이 넘어가는 폭발적인 APM으로 아주 극단적인 미세컨트롤로 승부하는 게이머였다.(...) 아마 알파스타가 임요환 시대에 나왔다면, 임요환의 별명은 황제가 아니라 (유닛 컨트롤 계의) 임공지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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