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여름에 군대를 전역하고 만난 여자친구가 있는데, 2년만에 뻥 차였습니다.

올해 여름~가을은 그야말로 제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저점이었던 시기예요.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제 할일에는 집중을 못하고, 어떻게 하면 전여친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를 방구석에서 고민했죠. 

하남자 그 자체였습니다.


아니 그래서 뭐 너가 지금은 하남자가 아니냐 물으시면 할말이 없지만, 몇개월간 이별극복, 연애칼럼, 자존감수업, 자기계발 등등을 찾아서 공부하면서 이론으로는 나름 빠삭해지지 않았나 싶고,

꾸준히 운동하고, 책도 읽고, 밥도 잘 챙겨먹고, 일찍 자서 일찍 일어나고, 해야할 일은 해가면서 차근차근 행동이 개선되고 있다는게 마냥 즐겁습니다. 


성숙한 연애를 하는 법, 이별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법, 혼자서도 풍요롭게 지내고 자기 중심이 잡힌 삶을 사는 것의 중요성 등등 고민하고 공부한 점들이 많지만,

그런 세세한걸 감히 제가 얘기하기엔 장황하고 재미도 없고, 그럴싸해 보여도 파고들면 그닥 정확하지도, 전문적이지도 않은 얘기일거라서 너무 주제넘구요,

저는 그냥 이번 경험을 통해 느낀 흥미로운 지점들만 제누스에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1> 이별상담, 재회상담, 연애상담 이런쪽에 시장이 생각보다 되게 큰 것 같다.

 이별을 겪고 유독 너무 오랫동안 힘들어하고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삶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번 이별은 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ㅋㅋㅋ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이들은 일단 듣고 싶은 말들을 찾으면서, 전애인과 다시 만날 전략을 절실하게 물색합니다. 


- "그냥 잊으세요.. 그때의 당신은 그때의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 "절대 연락하지 말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마세요. 헤어지고 싶다는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고, 상대에게 단절을 주세요."

- "시간이 약입니다. 지나면 다 추억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그랬구나.. 하고 흘려보내시면 됩니다."

- "실패는 분석을 포기했을 때 실패로 남습니다. 지난 연애에서 아쉬웠던 점들을 개선하셔서 다음 사람에게 더 좋은 사랑을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게 당신의 잘못인 것도 아닙니다. 너무 자책하지도 말아요. " 

- "세상에 여자 OR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왜 한 사람에 목을 매나요? 당신이 전애인을 만나기까지 뭐 몇명이나 접해봤길래 그 사람이 최선인 것처럼 얘기하시나요? 당신이 그렇게 미래를 잘 보신다면 사업을 하세요. 떼부자가 될테니"

- "후회는 그만 하시고, 연애에서 배운 점을 정리하고, 이제 당신이 해야할 일에 집중하며 앞을 향해 갑시다. 세상에는 이별보다 가혹한 일이 많습니다. 증권시장에선 당신이 A주식 대신 B주식에 매수버튼을 클릭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재산을 몇배 불릴 기회를 놓치기도 합니다. 그에 비하면 연애는, 상대가 당신에게 기회를 여러번 줬을 겁니다. 훨씬 관대하지요. "

- "사람은 원래 혼자 잘 살아야해요. 혼자서도 행복하고 풍요로워야죠. 사람이 한명 왔다가 가는게 사실은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맺고 끊음에 익숙해집시다. 이건 연습이 필요한 일이에요"

이런얘기들은 해답에 가깝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단순하고 명쾌한 말들이죠. 저도 이런 종류의 문장들은 50개 이상 정리해놨어요ㅋㅋㅋ 훨씬 따뜻한 버전도 있고 차가운 버전도 있고 그래요. 그렇지만 이런 일반론적인 얘기들은 절박한 사람들이 듣고싶은 얘기가 아닙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솔루션을 원해요.


- "이 방법이면 몇달만에 재회합니다."

- "상대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보세요. 심경의 변화가 올겁니다."

- "카톡 프로필 사진을 이런식으로 바꾸고 상대를 자극해보아요"

- "당신의 경우 단기간에 재회가 되는 획기적인 방법들이 있습니다."

- "단기간에 재회가 된 이러이러한 사례가 있어요."


이런 정보들을 절박하게 찾습니다. 거의 모든 커뮤니티 글, 유튜브 영상을 싹다 보게 되고, 몇몇 인기 동영상, 인기 글 뿐만 아니라 최근에 업로드된 조회수 없는 자료까지 박박 긁어서 보게 되죠.  

그러다가 크몽이나 재회 블로그, 재회업체 등을 찾아서 결국에 적든 크든 돈을 쓰고 상담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나의 경우는 특수하니까, 나의 구체적인 사정을 누가 알면 특별한 방법을 알려줄지 몰라! 혹시 내가 모르는 재회의 편법이나 단기적 전략이 있는지 기대하면서 말이지요.

사실, 저도 만원~2만원짜리 서면상담을 몇번 받았습니다. 다들 획기적인 전략이 있을 것처럼 광고하지만 막상 구구절절 제 경우를 얘기해보면, 일반론으로 넘어갑니다.

"절대 연락하지 마시구요, 일단 잊으시고 당신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달리는게 최선입니다. 장기적으로 보시구요, 당신이 훨씬 멋있어지고 상황이 나아졌을때, 그때도 상대가 그립다면 그때 담백하게 카톡 하나 보내보세요. 그렇지만 아마 그 사이에 당신도 생각이 바뀌고 굳이 전 사람을 만나고싶어하지 않아할겁니다." 


돈을 쓰고 뻔한 대답을 듣지만, 별로 화는 안나는 것 같아요. 틀린 말을 해준건 아니니까. 또,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니 그것만으로 마음이 위로되는 면이 있죠. 

물론 악덕 업체도 있습니다. 재회를 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고 광고하고, 재회성공 후기들을 올려놓고, 실제로 상대를 자극하는 무리한 방법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그런 데에 몇십만원~몇백만원을 썼다는 사람들도 보여요. 근데 대부분은 몇만원짜리 상담을 받고 일반적인 이별극복법을 전해듣고 끝나는 것 같습니다. 


이게 희망을 놓지 못하고 절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시장이 작지 않은 것 같아요. 또, 이별극복과 재회에는 정답에 가까운 몇 가지 말들로 거의 모든 경우를 커버할 수 있다보니, 그닥 전문성이 필요해보이지도 않구요. 또, 연애와 이별은 국경을 뛰어넘어 다들 겪는 일이고 그러다보니 이 시장에 수요가 꾸준해보여요. 특징은, 수요자가 많이 절박한 상황이라 서비스에 대한 지불용의가 생각보다 큰거 같다. 이런느낌! 


<2> 웹서비스는 도메인 컨텐츠가 진짜 중요한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저는 인터넷에서 독특한 형태의 비즈니스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가 재회상담 챗봇 웹서비스를 만들어서 올려놨더라구요. 

초반엔 무료로 말을 섞어주더라구요. 


Q1. 이별했니? 

(1) 웅, 슬포 ㅠㅠ (2) 공식적 이별은 안했지만 곧 헤어질 듯 해. 조마조마해 (3) 아니? 문제없는데 


Q2. 이별한지 얼마나 됐니?

(1) 1주 미만 (2) 1주~1달 (3)1달~3달 (4)3달~6달 (5)6달 이상


Q3. 누가 찼니?

(1)내가 (2)걔가


Q4. 내 질문에 좀 더 답하면 재회 가능성을 내가 나름 계산해볼 수 있는데, 해볼래?

(1)웅! (5500원, VAT포함) (2)생각해보고 올게 (3)안할래


이별을 슬기롭게 극복했거나, 평온한 상태의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웹사이트를 발견하지도 못할거고, 이 챗봇을 딱히 해보지도 않을거고, 해본다 한들 5500원의 지불용의는 없을 겁니다.

근데, 절박하고 마음이 힘든 사람이면, 5500원은 충분히 가볍게 지불할만 한 것 같습니다. 직업이 없고 부모님 용돈을 받는 백수인 저도 아무렇지 않게 결제했으니까요(아 부끄럽네요).

어디에 상담을 요청해도 상담시간을 조율해야하고, 지금 당장 답답한 그 마음을 해소해주기 어렵죠. 그리고 아무리 짧은 상담도 15000원~2만원 정도는 내야하는데, 그런 상담을 몇번 받아본 사람이라면  5500원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액수니까요. (챗봇 서비스를 특정하기 싫어서 5500원이라 적은거고, 사실 그보다 더 비쌌습니다.)

간편결제시스템을 잘 해놨더라구요.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가 되니까 순식간에 결제를 했고, 10개 남짓한 질문에 더 답을 했습니다.


결론은 뭐 별거 없었습니다. 설문에 대한 응답을 근거로 재회확률을 뇌피셜로 계산해줬고, 위에서 말한 이별극복의 일반론적인 말들을 늘어놓더라구요. 


근데 이 서비스를 보고 느낀게 꽤 많습니다. 

- 꼭 노련하고 수준 높은 개발 기술과 특별한 디자인 요소가 있어야만, 흠잡을데 없는 UI를 구비해야만 웹/앱 서비스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구나.. 

- 이 서비스는 지독한 이별을 겪고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이 기획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검색을 통해 이런 사이트를 발견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얼마나 절박할지, 재회상담과 관련해서라면 그게 챗봇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지갑을 얼마나 쉽게 여는지, 그런걸 싹다 파악하고 이걸 만들었구나..

- 연애나 재회 상담은 (1)사람마다 스토리는 다양하고 (2)뚜렷한 정답은 없지만 (3)해답에 가까운 일반론적인 얘기들은 정해져 있어서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이 있음. 챗봇으로 만들기 딱좋네..! 컨텐츠를 참 잘 정했다.

- 어차피 챗봇이면 이참에 그냥 영어버전, 중국어버전, 일본어버전 등 전세계 언어로 만들어도 좋겠네! 연애와 이별은 전세계사람들이 겪는 거니까 등등


제가 이쪽 분야에 지갑을 열어보고 나서 생각해보게 됐네요. 크몽 상담, 이 챗봇상담 까지 해서 10만원 조금 안되게 썼는데, 뭐 지나고보니 아직도 그리 아깝진 않아요. 재밌었어요!



쭉 적다보니 영양가도 없는거 같고 부끄러운 글이네요. 근데 이런 얘기도 그냥 풀어놓고 보는게 커뮤니티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ㅎㅅㅎ 귀엽게 봐주십시오.

2023년 따뜻하게 마무리하시길 바래요!